당연한 것들
우리는 평소 산소에 대해 감사하며 살지 않는다.
숨을 쉬는 일은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이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다 공기가 나빠지고 자연이 훼손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당연했던 것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감사는 늘 그렇게 뒤늦게 온다. 잃어버릴 위기에 놓이고 나서야.
더 아픈 건 그다음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받지 못하게 되는 순간, 사람은 감사 대신 불평을 꺼놓는다. 받아온 것에 대한 고마움은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면서, 그것이 없어지면 서운함부터 말한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진다.
사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사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내 아이가 그럴 때, 나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밉다. 예의를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대단한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받은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 한마디를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건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를 표현해보자"라고 말하는 나와, "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아내. 어느 쪽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내는 아이가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하게 되는 것이 싫었을 테고, 나는 마음은 있는데 표현을 배우지 못한 채로 자랄까 봐 두려웠다. 다만 아이 앞에서 두 어른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으면, 아이는 결국 더 편한 쪽으로 간다. 그게 사람이니까.
솔직히 요즘은 뭘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고마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인데, 이런 내가 너무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한 걸까.
넘어져 본 사람이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나는 어린 나이에 돈을 꽤 벌어보기도 했고, 사업을 하다 망해보기도 했고, 지금은 다시 일어서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많다. 넘어져 본 사람이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고난 없이 살아온 사람은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없다. 그래서 막상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훨씬 어렵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누려온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잊어갈 때쯤 찾아오는 고난은, 어쩌면 큰 축복이라고.
20대에 사업이 망하지 않고 계속 승승장구했다면, 나는 아마 감사를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넘어졌을 때 훨씬 더 크게 상심해서, 다시 일어설 힘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잃어본 경험이 나에게 감사를 가르쳤다.
그래서, 어떻게
여기까지 쓰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내가 감사를 배운 방식은 결국 '잃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배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가 무너져 봐야 감사를 안다면, 그건 너무 비싼 수업료다. 부모라면 누구도 그 길을 권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해"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 밥상 앞에서, 누군가의 수고 앞에서, 아내에게, 내가 매일 감사를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것. 감사는 아마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물드는 것에 가까울 테니까.
그리고 아내와 다시 이야기해봐야겠다. 아이를 사이에 두고 각자 옳은 말을 하는 대신,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걸 먼저 확인하는 일부터.
오늘은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답을 찾아야 할 사람이 아이가 아니라 나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다.
마음 깊이 고민해본 하루의 기록을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