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다음 날, 알람이 울리자 그는 평소처럼 샤워하고, 셔츠를 다리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개찰구를 지나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야 깨달았죠. 어제 사표를 냈다는 사실을요.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배를 잡고 웃었지만, 웃음 끝에 좀 서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며칠 전에 냉장고 문을 열고 5초쯤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여기 왜 왔지'를 세 번이나 반복했거든요. 인간은 생각보다 자주, 아주 태연하게, 자기 몸을 자동주행에 맡깁니다.

1. 몸이 먼저 움직이고, 정신이 뒤늦게 따라온다

가장 흔한 유형은 '습관이 판단을 앞질러 버리는' 실수입니다. 앞의 퇴사 출근이 딱 그렇죠. 심리학에서는 이걸 캡처 오류(capture error)라고 부릅니다. 익숙한 행동 경로가 원래 하려던 행동을 낚아채 가버리는 현상이에요. 매일 반복하던 동선이 워낙 강하게 뇌에 새겨져 있어서, '오늘은 다르다'는 정보가 미처 개입할 틈이 없는 겁니다.

영국의 인지심리학자 제임스 리즌은 이런 무심결의 실수를 '행위 착오(action slip)'라 이름 붙이고, 이것이 무능이 아니라 오히려 뇌가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는 증거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복되는 일을 자동화해두어야 새로운 문제에 뇌를 쓸 수 있으니까요.

즉, 퇴사 다음 날 출근한 그 사람은 멍청한 게 아니라, 뇌가 지나치게 성실했던 겁니다. 위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른 아침 텅 빈 지하철 승강장에 정장 차림 남자가 홀로 서서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멈춰 있는 장면, 차가운 파란 조명, 시네마틱한 롱숏, 살

2. 도구를 잊고 목적만 실행하는 사람들

두 번째 유형은 더 웃깁니다. '무엇으로' 하는지를 통째로 빼먹는 경우죠.

  • 세차를 하러 나섰는데, 세차장이 집에서 가까운 게 갑자기 기특해서 차를 두고 걸어갔다는 사람. 도착해서야 씻길 차가 없다는 걸 알았답니다.
  • 지방 출장을 자기 차로 다녀온 뒤, 돌아올 땐 편하게 기차를 탔다는 사람. 며칠 뒤 '내 차 어디 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하죠.
  • 검색을 하려고 브라우저를 켜서, 구글 검색창에 또박또박 '구글'이라고 쳐 넣은 사람. 이미 구글 안에 있는데 말이에요.

이건 목적(세차·귀가·검색)에만 집중하느라, 그걸 이루는 수단(자동차·검색창)이라는 맥락이 통째로 증발한 상태입니다. 뇌의 작업 기억은 생각보다 용량이 작아서, 한 번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정보가 서너 덩어리 남짓이라고 해요. 목적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하면 수단은 밀려나 버립니다.

자동 세차기 앞에 빈손으로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람, 거대한 회전 브러시와 물보라가 배경, 밝고 과장된 코미디 톤, 정면 미디엄샷

3. 사람까지 두고 오는 레전드

여기서부터는 스케일이 커집니다. 주유소에서 있었던 일이라며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요. 부부가 같이 주유를 하러 나갔다가, 남편이 잠깐 편의점에 들른 사이 아내가 주유를 마치고는 혼자 유유히 출발해 버렸다는 겁니다.

한참 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죠.

남편아내
지금 어디야?나 집에 가는 길이지
…그럼 나는?(정적) 아, 내가 자기를 두고 왔네

배우자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배우자를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3초. 상상만 해도 아찔합니다. 참고로 이런 '동승자 망각'은 생각보다 흔해서, 해외에선 뒷좌석 아이를 두고 내리는 사고를 막으려 시트벨트 미착용 경고처럼 뒷좌석 확인 알림 기능을 넣은 차량이 늘고 있을 정도예요.

4. 빨리 가려다 제자리로 돌아온 사람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유형은 '똑똑하게 움직이려다 도로 원점'인 케이스입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어떤 분이, 창밖으로 자기가 다음에 갈아탈 버스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걸 봤답니다. '저걸 놓치면 안 돼!' 하고 뒷문으로 후다닥 내려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앞으로 달려가 그 버스 앞문으로 탔다죠. 스스로가 대견해서 '역시 난 발이 빨라' 하고 뿌듯해했는데, 두 정거장쯤 지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대요.

이거… 방금 내가 내렸던 그 버스잖아?

뒷문으로 내려서 앞문으로 다시 탄, 완벽한 순환선. 노선표가 따로 없습니다. 급할수록 뇌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이보다 잘 보여주는 예가 있을까요.

도심 버스 정류장에서 한 사람이 버스 뒷문으로 내려 같은 버스 앞문으로 달려가 타는 순간을 화살표 동선처럼 보여주는 장면, 경쾌한 만화풍 일러스

5. 그리고, 마스크를 쓴 채 침을 뱉은 사람

마지막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마스크를 낀 채로 습관처럼 '퉤' 하고 침을 뱉은 사람. 결과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몸에 밴 동작 하나가 상황 판단보다 얼마나 빠른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죠.

그래서, 우리가 얻어갈 것

이 이야기들이 웃긴 이유는 남의 일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전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어서입니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일상을 자동화해 놓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실수에 더 잘 빠집니다. 그러니 오늘 당신이 뭔가 어이없는 짓을 했다면, 자책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 뇌가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영수증 같은 겁니다.

대신 딱 하나, 중요한 순간 앞에서만 잠깐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 지금 자동주행 중인가, 아니면 진짜 운전 중인가?' 오늘 당신의 가장 어이없었던 순간은 무엇이었나요? 댓글로 자랑해 주세요. 우리 같이 웃자고요.